최미나수는 진짜 빌런일까?

환승연애5 최미나수에 대하여

문화·예술

정서윤

10/12/20261 min read

최미나수는 진짜 빌런일까

최근 솔로지옥 시즌 5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 프로그램은 지옥도라 불리는 외딴 섬에서 출연자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커플이 성사되는 경우에만 천국도로 이동할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출연진의 감정 변화와 관계 형성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매 시즌 화제를 모아왔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솔로지옥 시즌 5 종영 이후 김재원 pd는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건 진짜다, 찐이다 싶은 순간만 내보냅니다. 그 외의 장면들을 칼같이 덜어내는 것이 시청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문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가 화면을 통해 마주한 최미나수의 모습을 그녀의 온전한 인격이라 치부해도 무방한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제작진의 의도에 의해 선택된 찰나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최미나수는 왜 빌런이 되었을까

이번 시즌에서 가장 화두가 된 인물은 단연 최미나수였다. 초반부 임수빈과 견고한 러브라인을 형성하던 그녀가 여러 출연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비춰지자, 커뮤니티에는 “이기적이다.”, “배려가 없다.”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스튜디오 패널들조차 “작작 하세요.”, “쉴드 불가”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빌런은 서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갈등을 유발하는 인물이 존재하기에 다음 회차에 대한 궁금증이 유지되고, 시청자는 그 긴장감을 소비하기 위해 화면 앞에 앉는다. 욕하면서 본다는 말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심리가 담겨 있다. 타인을 비난하는 행위는 곧 자신을 도덕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일종의 심리적 쾌감이 발생한다. 나아가 커뮤니티에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는 행위는 강한 소속감을 형성하고, 프로그램은 한 주 내내 지속되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비난의 고리는 쉽게 멈추지 않고 증폭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최미나수는 전형적인 빌런의 형상으로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영 이후 드러난 제작진의 시선은 대중의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김재원 PD는 “최미나수 씨는 카메라 앞에서 그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캐릭터”라며 프로그램 흥행의 일등 공신으로 그녀를 치켜세웠다. 대중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출연자에게 제작진이 도리어 찬사를 보내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편집은 서사를 설계한다

그 답은 편집이라는 설계 과정에 있다. 김재원 pd는 편집의 기준을 “감정에 가장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임하는 인물 위주”라고 설명했다. 역설적이게도 최미나수가 비난의 중심에 선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기에 가장 오랜 시간 카메라에 담겼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출연진은 제작진에게 매력적인 재료가 되는 동시에 대중의 잣대 앞에 더 자주 노출된다. 결국 편집은 하나의 서사를 창조하는 행위다. 동일한 행동이라도 어떤 맥락 뒤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인물의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미소 짓는 장면 뒤에 곧바로 타인을 험담하는 인터뷰를 붙이면 그 사람이 순식간에 모순적인 인간이 되는 것처럼, 최미나수의 이미지가 중반부까지 빌런으로 고착되었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성장캐나 해맑은 캐릭터로 재해석된 것 역시, 출연자의 실제 변화만큼이나 제작진이 구성한 편집의 흐름이 변했을 가능성이 큼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전체가 아닌 파편을 소비한다

여기서 우리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본질적인 한계를 마주한다. 다수의 인원이 며칠간 촬영한 수백 시간의 기록을 단 1시간으로 압축하는 순간 그것은 제작진의 주관적인 해석이 된다. 시청자는 출연자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이 선별하여 재구성한 파편들을 소비할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파편만으로 한 인간의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특히 숏폼 영상, 밈과 같이 단편적인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는 상황의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자체에 매몰되기 쉽다. 10초 남짓한 영상 속의 표정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이 되고, 찰나의 실수가 평생의 꼬리표가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는 물속에 잠긴 거대한 본체를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사실 우리는 매일 편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논리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매일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릴 때도 수십 장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르고, 필터를 입히며, 캡션을 수정한다. 단체 채팅방에서 메시지 하나를 보낼 때도 몇 번씩 고쳐 쓰며 ‘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제작진이 최미나수의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과 우리가 sns 프로필을 꾸미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퍽 닮아 있다. 철학자 칼 융은 개인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학교에서의 나, 친구 앞에서의 나, 부모님 앞에서의 나가 조금씩 다른 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은 이 유연한 페르소나를 고정해버린다. 오프라인의 기억은 휘발되지만, 온라인의 편집본은 맥락이 제거된 채 공유되고 저장된다. 우리 역시 스스로 편집한 몇 장의 게시물로 정의되고 평가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화면 속 최미나수가 자신의 편집본을 보며 당혹스러워했듯, 우리도 과거에 올린 게시물을 보며 ‘이땐 왜 이랬을까’ 하는 경외감을 느낀다. 그 간극이 불편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속의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 더 가깝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