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이 찬란한 이유

인문·사회

김윤진

8/31/20261 min read

3월의 교정은 분주하다. 창밖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맺는 벚나무가 살아 숨 쉬고, 교실 안의 우리는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기 바쁘다. 겨우내 얼어 있던 학교가 다시 활기로 가득 차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활기 이면에는 각기 다른 무게의 불안이 공존한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1학년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에, 적응을 마친 2학년들은 본격적인 입시 궤도에 진입했다는 긴장감에, 그리고 마지막 레이스를 시작한 3학년들은 시간이 없다는 부담감에 압도당한다. 어쩌면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선생님들조차 매년 반복되는 이 시작의 계절 앞에서 제자들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진 채 무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을 보낸다’는 표현을 쉽게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시간을 강물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것이 꼭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래서 아껴 써야 하고 낭비해서는 안 되는 소모품인 것처럼. 특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시간은 미래의 보상을 위한 담보로 취급된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라는 유명한 공부 자극 문구와 같이, 우리의 오늘은 내일을 위해 희생되어야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묻고 싶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바치는 이 방식이 정말 최선인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미래는 결국 현재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인데, 정작 그 조각들을 버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쯤에서 필자는 현대 물리학이 던지는 기묘하고도 혁명적인 가설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파생된 ‘블록 우주론(Block Universe Theory)’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의 인생이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교정에서의 하루가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지도 위에 새겨진 하나의 좌표라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실재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일정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관찰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지금’이라는 시점은 저마다 다르게 정의된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가 우주 저편의 누군가에게는 이미 먼 과거일 수도 있다. 이처럼 블록 우주론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마찬가지로 이미 펼쳐져 있는 하나의 차원이다. 또한 우주는 4차원 덩어리인 ‘블록’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건이 동등하게 실재한다. 시간의 흐름은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저 블록 속의 한 지점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가?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우리 눈에는 화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 필름 안에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가 모두 동시에 들어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주라는 거대한 블록 안에는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모든 순간이 특정 좌표에 고정된 채 동시에 실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이 흐른다고 믿는 것일까? 우리가 시간 속에서 가장 확신하는 순간은 단연 ‘지금’이다. 하루 동안 무수히 반복되는 이 지금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지점이 바로 지금, 곧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론의 대가 카를로 로벨리는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현재라는 개념이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게 만드는 하나의 심리적 기제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하지만, 이는 뇌가 구성한 편의적인 구조에 불과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실제 세계의 구조라기보다 뇌가 세계를 해석하고 그 안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지각 장치에 가깝다. 우리는 정지된 블록 속의 한 지점에 존재할 뿐이지만, 우리의 의식이 그 지점들을 순차적으로 읽어나가기에 시간이 흐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처음 발을 디뎠던 서툰 첫 등교 날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어느 오후도, 그리고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느낄 생소한 감정조차도 모두 우주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는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지나가 버린 과거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지금 서 있지 않은 다른 좌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영원한 현재일 뿐이다. 우리가 소모하고 있다고 믿었던 시간이 알고 보니 우주에 영원히 남아 빛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오늘이 찬란한 첫 번째 이유다.

스피노자에게 묻다

하지만 과학적인 설명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설득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나의 치열한 노력은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허무주의가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17세기의 고독한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를 만나야 한다. 스피노자가 아인슈타인이 가장 깊이 존경한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저서 『에티카』에서 우리가 고통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떠한 사물을 오직 시간의 선후 관계인 지속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분절적으로 인식하는 지속의 시각에 갇히면 우리는 늘 결과에 일희일비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수단화하게 된다. “이 시험을 망치면 내 인생이 끝날 것 같다.”거나 “이 슬픔이 평생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시간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셈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사물을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다시 말해 전체적인 필연성의 질서 속에서 바라보라고 말한다.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보면, 당신이 오늘 빼곡히 적어 내려간 오답 노트나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흘린 눈물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외려 그것은 당신이라는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벽돌 한 장과 같다.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찰나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진정한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조각 하나가 빠진 퍼즐은 완성될 수 없듯이, 존재해야 마땅한 모든 순간은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버려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오늘이 찬란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미래를 위한 수단이라서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조화 속에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필연적인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지금껏 설명한 블록 우주론과 스피노자의 철학은 공통적으로 결정론적 성격을 띤다. 결정론이란 우주의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에 의해 이미 정해진 물리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관점이다. 결정론자들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기에 미래가 우연히 바뀌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혹자는 “미래가 이미 우주 안에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그저 주어진 길을 걷는 인형에 불과한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정론을 체념의 도구가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스피노자는 그에게 ‘코나투스(Conatus)’라는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할 것이다. 코나투스란 모든 사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더 나은 상태로 확장하려는 본연의 힘, 즉 존재의 의지를 뜻한다. 우리가 외부의 압박이나 타인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할 때 우리의 코나투스는 위축되고 우리는 수동적인 슬픔에 머문다. 반면 내가 처한 상황의 필연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능동적인 기쁨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된 시공간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루의 의미를 찾으며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거창한 미래의 목표를 잠시 내려놓고,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좌표의 밀도를 높이는 데에 집중해 보자. 흔히 우리는 “지금 이 공부가 나중에 도움이 될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라며 끊임없이 미래를 잣대로 현재를 재단한다. 하지만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결과를 계산하는 머리를 잠시 끄고, 지금 내가 수행하는 동작과 감각 그 자체에 온전히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 삶의 밑그림이 시공간의 블록 속에 그려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좌표 하나하나를 채우는 색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코나투스다. 고등학생이라는 우리의 입장에 대입해 보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남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나의 힘을 기르는 것으로 받아들여보자. 이때 우리의 코나투스는 하기 싫던 공부마저도 주체적인 성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결정론이라는 바다 위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는 항해사가 되는 것, 철학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다.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오늘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1학년의 풋풋한 시작도, 2학년의 단단한 성장도, 3학년의 치열한 헌신도 모두 미래를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당신의 오늘이 찬란한 이유는 그것이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라는 조각 자체가 이미 우주의 일부로서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은 마치 완성될 그림을 위해 지금 칠하고 있는 색을 버리는 것과 같다. 결과라는 압박에 눌려 오늘을 함부로 훼손하지 말자.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시공간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주의 가장 찬란한 페이지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참고 문헌

카를로 로벨리. (2019).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역). 쌤앤파커스. (원서출간 2017).

김익현. (2000). 스피노자철학에서의 정신의 영원성과 직관지. 철학연구, 50, 87-109.